본문 바로가기
생활과 신앙

대표적인 ‘미혹’ 5가지에 속지 마라!!

by 카이로 B.G.PARK 2025. 4. 21.
반응형

성령께 붙잡힌 사람은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시대에는 어떤 미혹들이 있을까?

 

첫 번째 미혹은 진화론에서 비롯된 ‘사적 진리’와 ‘공적 사실’의 괴리현상이다.

 

우리는 종종 “창조는 신앙이고 진화는 과학이야”라는 말을 듣는다.

학교나 직장에서 세상은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면, 신앙으로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는다. 창조는 종교 혹은 믿음의 영역이고, 진화는 과학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이성의 도전은 ‘창조’를 ‘사실의 영역’에서 추방해 ‘종교의 영역’에 가두어버렸다.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세상에서는 진화론을 진리로 믿으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두 개로 쪼개진 진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모른 채 ‘분열된 인식’의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과연 사실, 팩트와 분리된 ‘사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까?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능력이 있을까?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신화’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능력이 있을까?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능력이 있으며, 창조 역시 역사적 사실이기에 의미를 가진다.

진화론이 가져온 미혹을 경계하라.

‘사실과 진리’는 유일한 것이지, ‘사적 진리’와 ‘공적 사실’로 쪼개질 수 없다. 그것은 모순을 회피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크리스천에게는 사실(진리) 아니면 거짓이라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미혹은 ‘진리’, 즉 ‘팩트’가 사라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이 사조의 영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팩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감정을 부채질해서 내게 유리한 결과를 얻고, 정적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이런 흐름 속에 살고 있다.

 

이렇게 팩트와 감정이 분리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그 결과는 불안과 혼란이다. 팩트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판단의 ‘기초’다.
그런데 이 팩트가 사라진 것이다. “왜 그렇게 했어?”,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이런데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세 번째 미혹은 ‘인본주의와 프로이트’이다.

 

두 번째 미혹에 기름을 붓는 것은 “네 감정에 충실해”라는 프로이트의 속삭임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제를 잠재의식으로 설명한다. 잠재의식 속에 욕망, 욕구가 있는데, 그것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문제의 해답은 그 억눌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조의 거센 흐름 속에서 “너 자신을 사랑해”, “네 감정에 충실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는 슬로건이 이 시대에 가장 매력적인 표현이 되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 아니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 이런 말을 들으면 ‘맞아!’ 하는 생각이 들며 왠지 모를 진한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멋지게 들리고, 진리처럼 들리고, 구원처럼 다가온다. 마치 그동안 이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긴 것처럼 느껴진다. 내 안에 억압되어 있던 욕구! ‘욕구야, 미안해! 내가 너를 너무 무시했어!’ 마치 이런 감정이다.

 

이 시대의 참 구원은 억눌렸던 욕구를 해방하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욕구를 억압하는 전통, 문화, 질서, 도덕, “이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해”라는 말은 무시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는 말이 진리처럼, 구원을 줄 것처럼 들린다. 이 시대의 사조다.

 

네 번째 미혹은 ‘문화 막시즘’이다.

 

문화 막시즘은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하는데, 그 본질은 ‘갈라치기’와 ‘분노’다. 분노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에 분노를 쏟아놓을 공공의 적이 있어야 한다. 없다면 하나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 전통적인 막시즘에서는 부르주아 자본가, 미국에서는 백인, 동성애에서는 기독교 그리고 페미니즘에서는 남성이 공공의 적이다. 사람들을 갈라치기하며 ‘소수’, ‘약자’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분노를 부채질한다. 선동한다. 막시즘의 중요한 방법론은 ‘선동’이다. 분노를 부채질해야만 사회변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전과 선동은 문화 막시즘의 절대적인 방법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방법의 옳고 그름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목적이 모든 방법을 정당화한다. 그 선동과 선전이 진리에 기초하든, 거짓에 기초하든 상관없다. 분노의 에너지를 만들어 사회를 변혁하고 공공의 적을 타도하여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 선전과 선동은 ‘선’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 막시즘은 성경적 진리와 가장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 면에서 오늘날 만연하는 ‘거짓에 기초한 프레임 씌우기’는 문화 막시즘이 연출하는 마귀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

 

다섯 번째 미혹은 ‘영’이다.

 

미혹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말로 믿으면, 그것은 ‘영’이 된다. 이것이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어떤 것을 깊이 믿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영’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예수를 정말로 믿으면 성령께 사로잡히고, 미혹을 정말로 믿으면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다. 일단 영에게 사로잡히고 나면 말이나 논리로는 어떻게 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것도 그렇다. 말로 설명이 안 되지 않는가! 그냥 성령받으니 믿어졌다. 물론 처음에는 알아보고, 성경도 읽어보지만, 결정적으로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미혹도 그렇다. 처음에는 듣기도 하고, 알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가면, 이제 ‘영’이 된다.

 

그래서 기도 외에는 답이 없다.

성령께서 더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령님께 열려 있는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비교적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을 보게 된다. 우직하기는 해도 쉽게 미혹에 흘러 떠내려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기도는 약하고, 대신 생각이 많은 성도들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가 많다. ‘어? 어떻게 크리스천이 저렇게 생각하지?’ 의아할 때가 많다. 미혹은 ‘영’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성령 안에서 더욱 깨어 있기를 축복한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다. 성령 충만하라.

 

- 떠내려가지 마라, 고성준

 

† 말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요한일서 4:6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신에게 사로잡힐 때 미혹에서 벗어나 진리를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을 떠나 나를 바라보면 어느새 미혹에 빠져 흘러내려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 적용과 결단

오늘도 나를 미혹하게 하는 것들에 귀 기울이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며 그 말씀을 꼭 붙잡고 행하기 원합니다.

 

출처 : 갓피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