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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신앙

이 말씀만 믿으면, 성경은 다 믿을 수 있다!!

by 카이로 B.G.PARK 2025.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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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가?

진화론이 현대 세계관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게다가 진화론에서 발원하는 현상들은 사람들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프로이트나 문화 막시즘,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초한 현상들이 MZ세대에게서 드러날 때 그것은 기성세대의 가치와는 대비되는 사회현상을 만들어낸다. “남자 며느리를 얻는다고?” 이런 식의 충격이 있다.

 

그에 비해 진화론에 그 뿌리를 둔 현상들은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사고와 문화 속에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 만큼 진화론은 아주 깊은 곳에서 다른 사조들의 기초를 이룬다. 진화론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자.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에게 다윈(Charles Darwin)으로 대표되는 진화론의 내용은 이미 익숙할 것이다. 인간이 단세포로부터 시작해 진화되어왔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화론은 진리일까?

당연히 아니다. 진화론의 문제점은 과학이 아닌데 과학인 척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화론의 주장은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증명될 수 없다. 과학에서는 이런 것을 ‘가설’이라고 부른다. 즉 사실이 아닌 ‘추측’이라는 것이다. 화석을 진화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해석’이지 ‘증명’은 아니다.

 

그런데 이 가설, 이 믿음이 인간의 사조와 세계관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문학에도 접목되어 진화사회학, 진화심리학, 진화윤리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학문에 적용되는 주류 방법론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진화론적 사고는 인본주의 세계관의 기초로 자리 잡게 된다.

 

진화론에서 비롯된 첫 번째 미혹은 ‘사적 진리’와 ‘공적 사실’의 괴리현상이다.

앞선 장들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종종 “창조는 신앙이고 진화는 과학이야”라는 말을 듣는다. 학교나 직장에서 세상은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면, “신앙으로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말을 듣곤 한다. 창조를 ‘사실의 영역’에서 추방하여 ‘종교의 영역’에 가둔다.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세상에서는 진화론을 배우며 진리로 믿고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두 개로 쪼개진 진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모른 채 ‘분열된 인식’의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과연 ‘팩트’와 분리된 ‘사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까?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능력이 있을까? 천국과 지옥은 실존하는 사실일까? 아니면 사적 진리일까? 천국이 실재가 아니라 사적 진리라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실재도 아닌 것을 위해 이 땅의 것을 희생하며 살아가니 말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능력이 있고, 창조 역시 역사적 사실이기에 의미를 가진다.

 

진화론이 가져온 미혹을 경계하라.

‘사실’과 ‘진리’는 유일한 것이지, ‘사적 진리’와 ‘공적 사실’로 쪼개질 수 없다.

그것은 모순을 회피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진화론이 만들어낸 두 번째 미혹은 “쓸모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반문해보자. 왜 쓸모가 없으면 죽어야 할까?

 

‘쓸모없음’이 왜 ‘죽음’과 연결되어야 하나?

그렇다! 자연도태! 진화론적 세계관은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개체는 자연의 선택을 받아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개체, 즉 쓸모없는 개체는 도태되어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인간의 쓸모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쓸모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 사 43:4

 

“네가 내 눈에”, 즉 하나님의 눈에는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각 사람의 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경쟁에서 이겨 쓸모를 증명해야 비로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미혹과 거짓에 속지 말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보배롭고 존귀’하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다.

 

우리의 쓸모는 ‘존재 자체’에서 오는 쓸모지, ‘유용성’에서 오는 쓸모가 아니다.

진화론은 ‘존재적 가치’를 ‘생산적 가치’로 바꿈으로써 인간을 생산을 위한 부품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진화론의 세 번째 미혹은 “나중 것이 항상 더 좋다”는 미혹이다.

나중에 나온 것이 진화된 것이기에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진화’라는 개념의 불완전함에 기인한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진화론의 치명적인 문제는 ‘가치의 방향성’을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진화를 통해 사회가 발전한다고 하는데 그 발전의 방향이 무엇인지, 지향점이 무엇인지 모른다. 진화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결국 진화가 일어나는 방향이 곧 ‘발전’이며, 진화의 방향이 곧 ‘선’일 것이라는 무책임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성경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성경은 ‘처음’이 가장 완전했다고 말한다.

‘나중’이 아니라 ‘처음’이 완전했다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이 추구하는 변화는 그 방향이 다르다.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원래 창조, 그 오리지널로 돌아가는 변화, 즉 회복을 추구하는 반면, 진화론은 진화가 만들어내는 변화, 즉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따라 만들어지는 변화를 좇는다. 미혹에 속지 말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 1:1

 

성경의 시작이며 기초를 이루는 말씀이다.

당신은 이 말씀을 믿는가? 진화론은 이 말씀에 대한 도전이다.

 

진화론의 본질은 이 말씀과의 전쟁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사탄은 교묘하게 미혹한다.

진리를 이원화함으로써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사적 영역’이라는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당신은 어떤가? 이 진리를 믿는가?

이것을 거부하거나 ‘사적 영역의 진리’로 제한하고 나면 그 나머지는 줄줄이 밀리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실재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말씀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종교적 위안을 주는 ‘인민의 아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창조주가 계신다. 이 진리를 지켜야 한다.

여기서 밀리지 말라. 당신에게는 창조주가 계시고, 그분 눈에 당신은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다. 당신 스스로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적 쓸모가 있는 자’로 인식할 것인지, 아니면 ‘성취를 통해 쓸모를 증명해야만 하는 고깃덩어리’로 인식할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 떠내려가지 마라, 고성준

 

†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1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며 창조하신 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시대의 미혹에 휩쓸려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이 우리의 창조주이며 왕이십니다. 아멘

 

† 적용과 결단

오늘 나의 삶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며

온전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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