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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신앙

그 길은 망하는 길이다, 빨리 빠져나와라!!

by 카이로 B.G.PARK 202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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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같이 변하겠다는 교만의 시작

 

만약, 그대가 ‘관점의 주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비로소 이제부터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대가 속한 사회(혹은 회사)의 어지러움들과 어려움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과 환경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과정을 주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세계관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 다른 세계가 열리는 지점입니다

 

사실 에덴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로 말미암아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선악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 선악과를 주신 하나님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법을 주신 하나님이 악한 것이 아니라, 법을 어긴 인간이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창조의 정점에 두신 걸까요? 왜 선악과를 인간의 곁에 두신 걸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균형’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가장 완벽한 균형감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선악과를 두신 것입니다.

 

물론, 그대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하고 있는 균형과, 성경에서 말하는 균형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대가 이해하고 있는 균형은 ‘평균율’(the average rate)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공평과 평등, 그리고 경쟁과 갈등에 관한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균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거리감’(distance)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저 땅인, 에덴동산에서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인간과 그 거리감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되, 그 창조물들 사이에 ‘한계’와 ‘경계’와 ‘거리’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그렇기에, 하늘과 땅은 구분이 됩니다. 바다와 육지는 분리가 됩니다. 더 나아가 바다에 사는 생물들과 육지에 사는 생물들도 완전히 다른 경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거리감을 두셨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으로서, 그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키우고 가꾸고 지킵니다. 그리고 나무와 실과와 동물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때 아담은 무슨 감정이 들까요? 아마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내가 이 땅의 ‘창조자다’라는 착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아담의 심중에, ‘이 모든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라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횡포를 권리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과 생각이 떠오를 때쯤에, 그의 눈앞에 ‘선악과’가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습니다. 그 나무는 어디에서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보면, 그날 아담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2장 16-17절

 

즉,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의 거리감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아담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다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에,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균형’을 잃지 않는 감각을 주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볼 수 있도록, 동산 중앙에 주셨습니다. 그 균형감은, 하나님과 인간의 확실한 격차입니다. 그리고 그 격차를 인식하는 태도가 결국 에덴을 유지하는 기능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에덴(Eden)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균형이, 가장 정확한 ‘관점의 주어’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해봅니다. 그대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관점의 주어’는, 그대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균형’입니다. 그 균형이 있을 때, 어떤 환경과 시간과 조건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에덴은 복원이 됩니다.

 

그러나 그대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에덴동산은 파괴됩니다.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번역한즉, 하나님이 주신 거리감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창세기 3장 4-5절

 

태초에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이런 생각을 했고,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대는 “이건 뱀이 유혹해서, 불쌍한 아담과 하와가 꼬임에 빠진 거잖아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무한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평소에 이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유혹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슬프지만, 어쩌면 그들은 평소에도, ‘이 가능성(?)’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보기에 특별히 달콤하지도 않은 저런 문장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영혼을 팔 만큼 매혹적이게 들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게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요.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의미는 사회학적 의미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언젠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사장님같이 되겠다’, 혹은 ‘건물주가 되겠다’, 혹은 ‘부자가 되겠다’ 등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상은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단어는 존재론적 의미가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존재론적으로 “내가 하나님으로 변하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아주아주 단순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그들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그들의 마음대로 행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떤 판단력도, 도덕도, 정의의 문제도, 관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기준 자체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초법적이고, 초도덕적이며,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자인 저의 언어로 지금 이것을 표현하면, 모든 ‘관점의 주어’가 자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만’의 시작입니다.

 

- 교만, 김일환

 

† 말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창세기 3:5

 

†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저희는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피조물의 위치와 경계를 넘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고,

창조주를 떠나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자 했던 마음과 생각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두신 에덴동산의 선악과라는 경계를 지키며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겸손히 나아가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나의 삶에 두신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잊지 않고 창조주 되시고

나의 삶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더욱 경외함으로 따르기 원합니다.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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