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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신앙

내 수고는, 왜 인정해주지 않으세요?

by 카이로 B.G.PARK 2025.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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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라!

 

성경의 보편적 가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 공의 그리고 자유다.

 

먼저 ‘자유’에 대해 살펴보자.

나는 가장 중요한 성경의 보편적 가치로 ‘자유’를 꼽고 싶다. 물론 사랑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들보다 더 위에 있는 ‘절대가치’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인간에게 ‘자유’를 보장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주시지 않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시작이자 기초이며 절대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평화도, 그 어떤 것도 세워지지 않는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를 ‘자유’가 있어야 구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를 자유, 반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자유가 없다면, 그래서 기계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면 구원은 의미를 잃는다. 다시 말해 자유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

 

사실 자유가 없으면 구원은 말할 것도 없고, 타락도 없고 죄도 없다. 생각해보라. 죄를 선택할 자유가 있으니까 ‘죄인’인 것이지,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죄는 자유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자유가 있어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없으면 당연히 심판도 없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것으로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닐 것이다. 자유가 없으면 죄도 없고, 심판도 없고, 결국 구원도 없다.

 

또 자유가 없으면 하나님의 통치도 없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에 의한 강압이 아니다. 그분의 통치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분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가 없으면 자발적 순종이라는 것도 없다. 그렇기에 자유가 없으면 하나님의 통치도 없다.

 

사랑도, 구원도, 하나님의 통치도, 선행도, 모두 자유를 기초로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부터 ‘자유’라는 기초 위에 설계되었다. ‘자유’는 성경적 가치의 가장 기초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통제되면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신앙의 모든 행위는 자유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치는 ‘사랑’이다.
사람들이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평등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자유를 풀어놓으니 이것이 가관이더라는 것이다. 가진 자들의 억압과 착취, 부패 등.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프랑스 대혁명의 기치도 결국 자유와 평등이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획일화된 평등’은 성경의 주장과는 결이 다르다. 이것이 아주 교묘하다. 평등은 일견 성경의 가치인 듯 보이지만, 성경을 깊게 읽어보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획일적 의미의 평등일까? “사환들아, 주인들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평등일까?

 

사실 하나님은 만물을 ‘획일적으로 평등’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다. 다양성이 있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평등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만약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평등이 성경적 가치라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평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창조하셨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평등’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사랑이다!


시작은 불평등했을지라도 사랑으로 그것을 평등하게 하라는 것이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사랑으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평등케 하는 성경의 원리다.

 

사랑에도 컨트롤러가 필요하다.
아무것이나 사랑한다고 모두 사랑은 아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마귀도 불쌍한데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진지하게 물으신 적이 있다. 사랑의 컨트롤러는 ‘의’이다. 긍휼의 마음으로 아무나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 가치는 아니다. 사랑은 반드시 ‘의’에 기초해야만 한다. 자유의 컨트롤러가 ‘사랑’이라면, 사랑의 컨트롤러는 ‘의’다.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북한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올바른 태도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Yes”이면서 동시에 “No”다.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맞다. 성경적 가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악한 정권까지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성경적인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의’에 의해 컨트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치는 ‘공의’, 즉 정직과 공정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이는 “억울함이 없는 것”이다. 공정함은 성경적 가치다. 억울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정직함도 성경적 가치다.

 

하나님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의 속성이 ‘공정’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굳이 십자가를 지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죄 없는 것으로 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실 수 없으셨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공정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 속에 정직과 공정의 가치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의’에도 컨트롤러가 필요하다.
공의는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힘과 법을 통해 공의를 집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주의를 거부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발적 헌신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음에 법을 기록하시는 새 언약’의 내용이다.

 

그렇다. 의는 ‘자유’에 의해 컨트롤되어야 한다.
각 사람이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정직과 공정을 행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가 된다. 그렇지 않고 율법이나 외부적인 힘에 의해 ‘의’가 집행된다면 그것은 ‘의’라기 보다는 ‘억압’일 확률이 높다. 사회적 차원의 ‘의’는 ‘규제’라는 조금 다른 관점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개인적 차원의 의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이렇듯 자유와 사랑과 공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라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유는 사랑에 의해 컨트롤되며 사랑은 의에 의해 컨트롤되고, 의는 다시 자유에 의해 컨트롤된다. 마치 삼위일체처럼 자유와 사랑과 공의는 함께 맞물려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복음적 책무와 더불어 사회적 책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속에 성경의 보편적 가치들, 자유와 사랑과 공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기도와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하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교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다시 한번 ‘성경의 권위’ 앞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가라. 그리고 자유와 사랑과 공의의 가치를 외치고 사회적 책무를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 앞에 구하라.

 

- 떠내려가지 마라, 고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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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요한복음 8:32

 

† 기도

이 세상에서 성경의 보편적 가치들, 자유와 사랑과 공의를 분별하며 행하기 위해 주님 앞에 더욱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인도 받아 나의 생각과 마음을 깨뜨리기 원합니다. 깨어진 그 자리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게 하셔서 복음적 책무와 더불어 사회적 책무도 함께 실현하는 주님의 자녀 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세요.

 

† 적용과 결단

오늘 내가 실천할 성경의 보편적 가치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지혜롭게 행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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