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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신앙

내 자녀가 “복”을 확실히 받게 하는 방법

by 카이로 B.G.PARK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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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새삶의 시작

때로는 외롭고 쓸쓸했던 유년기가 상처가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엄마의 사랑 덕분이다. 모든 결핍을 채우고도 남는 엄마의 변함없고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며 오빠와 나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엄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많이 닮아있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사랑 표현과 스킨십을 정말 많이 해주었다. 나를 보고 “아유! 이뻐”라며 꼭 끌어안던 엄마의 행복한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엄마의 품에 안긴 시간만큼은 모든 걱정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양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질적으로는 충분했다.


난 엄마를 정말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질 못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하니까 엄마의 작은 단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엄마에게 면박을 주거나, 말다툼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애증의 관계로 지내던 어느 날,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다. 엄마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엄마가 돌아가셔야 하지?’

운전하다 신호등에게 묻고, 걷다가 구름에 대고 물었다. 정원에서 봄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엄마의 야윈 등을 보며 물었고,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주님, 왜 엄마를 데려가려 하세요? 저 엄마 없이 못 살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엄마는 1999년, 정민이가 돌을 맞이할 즈음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엄마는 쉰여섯 살이었다. 나는 돌잔치를 취소하고, 매일 혼자 울었다.

엄마는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항암은 거부했다. 평생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기에 스스로 암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본인에게 맞는 자연 치유를 택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엄마는 마르긴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가족들이 엄마가 완치된 줄 알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만큼.

 

그런데 발병 후 정확히 오 년이 지난 어느 날, 며칠 만에 본 엄마의 눈과 얼굴이 누렇게 변해있었다. 급하게 간 병원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했다. 암이 재발했고 전이됐다고. 이삼 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엄마는 약 십오 개월을 버티다 2004년 8월 20일, 하나님 품에 안겼다.

마지막 몇 개월은 적막한 슬픔과 숨 막히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물로 입만 축이고 오로지 링거로만 영양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맛있는 걸 권했다. 식사 때가 되어 숨어서 요기하려는 가족들에게 “괜찮아, 엄마 앞에서 맛나게 먹어. 그래야 엄마가 행복하지”라고 했다.


나였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무런 음식도 먹을 수 없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는 자신보다 곁에 있는 가족을 더 신경 쓰고 배려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그럴 수 없을 거 같다. 하지만 엄마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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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하기 며칠 전 엄마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온몸에 퍼진 암의 통증을 더 이상 집에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엄마에게 병원에서는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원하는지 물었고, 엄마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의사는 엄마에게 의식을 잃게 되니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동훈아, 정말 고맙다.”

엄마는 끝까지 병상을 지킨 오빠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게도 말했다.

“애라야, 끝까지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밤마다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너무 아팠지만, 너희를 생각하며, 버텼어. 그게 엄마가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우리 아이들,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 너희는 정말 좋은 아들, 딸이야.”


엄마는 마지막 말을 마치고 의식을 놓았다.
그리고 며칠 뒤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랬다. 엄마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 년이 넘도록 버텨주었기에 온 가족이 엄마를 보살피고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사랑을 표현하고, 대화하며, 이별을 준비했다. 엄마는 고통을 감내하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떠났다.


엄마는 생전에 〈날 구원하신 주 감사〉라는 찬양을 자주 읊조렸다.

엄마는 길가에 핀 장미꽃 한 송이에도 감사했다. 병상에서도 이 찬양을 들으며 감사를 멈추지 않았다. 콧줄을 끼고, 아무것도 못 먹어 체중이 삼십 킬로그램이 되었는데도, 쉰 목소리로 찬송했다.

엄마에게는 매 순간이 절실한 감사였다.

‘왜 착하디착한 우리 엄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셔야 했나요?’


엄마가 하나님께 간 지 이십 년이 되어간다. 그때는 몰랐던 내 물음의 답을 여전히 알아가는 중이다.

사실 엄마가 떠나고, 내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가득했다. 물론 엄마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수시로 눈물짓곤 했지만, 내면 깊은 곳은 평안했다.

엄마 이야기를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엄마를 데려가셨다고 믿기에 감사하다. 이 감사는 엄마가 물려준 귀한 유산이다.


올해 나는 엄마가 위암 선고를 받은 때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종종 나는 엄마의 삶과 내 삶을 이어 생각해 본다. 엄마의 인생처럼 나에게도 앞으로 육 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그려본다.

엄마, 도련님, 그리고 최근에 아버님까지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보낸 경험은 몸서리쳐지는 아픔이고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동시에 깊은 감사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고 싶은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천국 소망이 나에게는 확실하게 생겼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새 삶의 시작이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두렵던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 그것이 아무 이유 없이 믿어지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기적이자 은혜이자 가장 큰 감사다.

 

- 하나님, 그래서 그러셨군요!, 신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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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 시편 37:25~26

 

† 기도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잊지 않고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잊지 말고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삶의 기한이 정해져 있음을 기억하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주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시간들로 채워지길 소망하며 천국 소망을 두고 매일을 살아가는 삶 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주어진 삶을 사는 동안 주님께, 가족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더 감사할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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