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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신앙

주마중 식구들, 편안함에 이르렀나요?

by 카이로 B.G.PARK 2025.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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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에게 있다

 

상한 감정, 상감은 죄의 경험과 상처의 경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항상 치우쳐 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순간에도 상감의 영향을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차 사고를 당해본 사람은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어려워지고, 배신을 당해본 사람은 사람을 신뢰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상처가 많은 사람은 남편과의 관계도 쉽게 풀리지 않고, 엄마에게 눌려 산 아들은 아내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쓴다. 때로는 상감 때문에 거짓, 간음, 폭행까지도 불사한다. 상감은 전쟁하는 능력이다.

 

상감은 항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변호사다.
자기를 위해 이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변호사는 없다. 상감은 자기를 변호하고 증명한다. 상감은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선택한다. 기쁘면 간도 빼주고 슬프면 목도 맬 수 있다. 우리는 상감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져나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감정은 반드시 그 주제 감정을 파악하고, 상감의 움직임을 알고 사용해야 하는 에너지이자 힘이며 능력이다. 두 가지의 아픔이 공존할 경우 우리는 항상 덜 아픈 쪽을 선택한다. 옳거나 좋아서가 아니라 그나마 덜 아프기 때문이다.

 

부패한 모든 것이 열을 내듯이, 상한 감정은 부정적이고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한다. 그래서 상감을 강한 능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담대히 하는 것도, 누구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보호하는 것도, 무관심까지도 다 상감의 능력이요, 상감의 생산력이다. 상감이 그러하면 그 사람이 그런 것이다. 다른 공식은 없다.

 

무언가 일관성 있게 반복적으로 지속하고 있으면 그것은 시스템이다. 시스템화되었다는 것은 습관화되었다는 말이고, 당연히 예측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단 시스템으로 작동하면 그 작동을 멈추는 데 큰 값을 치르게 한다. 감정이 그렇다. 감정은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작동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작동하면 멈추기도 어렵다.

 

사람은 감정 언어로 구별된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감정이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감정이야말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강력한 기준 언어다. 사람은 경험으로 개인 모국어를 구축하고, 구축된 모국어는 주제와 주제 감정을 그 기둥으로 삼는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으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여기서 정해진다. 사건 사고가 생겼을 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는 모국어로 이미 정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매번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우리에게 쉽지 않은 과제가 되는 것이다.

 

‘화’가 주제 감정인 경우, 그는 화내는 것을 일관성 있게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단 화부터 내고 본다. 호흡이 빨라지고, 인상 쓰고, 소리를 지르고, 언행이 과격해진다. 그래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야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감정이 그 사람의 생활-풀이 공식을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동으로 클릭된다.

 

화가 주제 감정인 사람은 화를 연습하게 되어 있고, 슬픔이 주제 감정인 사람은 슬픔을 연습하게 되어 있다. 의도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동적이다. 감정 언어로 생활을 풀어가고 있기 때문에 조절이 어렵다. 상한 감정과 주제 감정이 일관성 있게 반복되어 이미 시스템화된 상태라면 지적이나 훈계 등의 웬만한 교육으로도 변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습관적인 상감을 내버려두면 ‘주제 감정-중독 상태’에 빠져서 정서적 정신적은 물론 육체적 질병까지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상감은 매일 사람을 상하게 하고, 계속 관계를 무너뜨리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을 망가뜨린다. 문제는 우리에게 상감이 주된 생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 악한 영향력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상감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탄의 조정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고 말씀을 접하면, 상한 감정으로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보게 되고, 그에 대해 비참함을 느껴 치유되기를 원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소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고, 필요한 상담도 받고, 치유 집회에도 가고, 기도하며 청소와 수리를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상감은 청소하고 수리하고 정리정돈을 잘할지라도, 상감 언어 시스템이 제거되지 않고 여전히 작동한다는 것이다. 언어 구조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미국에 갔지만 작동하는 언어 시스템이 한국어라면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상감을 대체할 다른 언어 시스템이 없다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겉으로 드러나게 작동되는 잡다한 상감을 청소했더라도, 그 시스템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오히려 상감이 일하고 싶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꼴이 된다. 귀신이 나갔다가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로 이해하면 좋겠다. 자기의 상감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그에 대한 면역력과 근육을 키워주지만, 상감과 싸우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형편이 좋아지지 않는다. 다른 언어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한, 자기 언어 시스템은 여전히 근실하다.

 

따라서 우리가 새 언어를 준비하지 않고 청소만 하면 소용이 없다.
변화는 불가능하다. 사건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선한 언어 시스템이 준비되지 않으면 여덟 귀신이 함께 놀기에 더 좋은 터전을 제공할 뿐이다. 옛사람을 치유하고 옛 언어를 청소했지만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옛사람은 사탄의 소유이기에 치유하고, 고치고, 또 고쳐도 다시 돌아가고, 더 나빠지기도 한다. 상감은 악의 다이내믹이다. 반드시 상감과 상관없는 다른 언어 체계를 갖추어야만 돌파할 수 있다. 새로운 언어 시스템만이 해결책이다.

 

새로운 언어 시스템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감성의 언어로 만들어진다.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감성의 결과다. 하나님의 영성이 아버지 되는 것이라면, 그 아버지의 감성은 사랑이다.

 

우리에게 그 감성이 다시 재작동하게 되면 그 사람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도 내어주고, 배신하고 살인한 자까지도 용서하고, 가족이 되게 한다. 그러니 오리지널 감성이 회복되어 작동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살 만할지 한번 상상해보라.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면, 거기에는 이미 천국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 상한 감정 버리기, 도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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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 아가 8:6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상감에 잡아먹혀서 하나님이 선물하신 은혜도, 기쁨도, 즐거움도 깨닫지 못하며 비참하게 사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하소서. 상감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감성 사랑을 연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하옵소서. 아멘

 

† 적용과 결단

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상한 감정의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성인 사랑을 구하며 그 사랑을 따라 행하기 원합니다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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