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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돌아왔다! 새롭게 바뀐 종묘는 어떤 모습?

by 카이로 B.G.PARK 202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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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는 죽은 자를 예우하는 최고의 존엄 공간으로 일종의 신전(神殿)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5) 조선의 최대 신성 공간, 종묘

2025년 4월 20일 5년에 걸친 수리를 마치고 종묘 정전이 새로운 모습을 공개하였다. 2020년부터 200억을 투입하여 시멘트 모르타르를 수제 전돌로 대체했고, 그간 공장에서 만든 기와 대신에 7만 장의 수제 기와가 정전의 품위를 더하게 되었다. 이번 수리 복원의 핵심은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최대한 살려 종묘 원형의 모습을 갖추게 한 것이다. 

종묘의 건립과 재건, 증축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 신전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도 최고의 신전이 있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宗廟)는 죽은 자를 예우하는 최고의 존엄 공간으로 일종의 신전(神殿)이다. 종묘는 조선 왕실의 최대 존엄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왕이 거처하는 궁궐보다 더 존엄의 상징이었다.

유교 경전의 근원을 제시하는 『주례(周禮)』에서는 도읍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社稷)을 세우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정리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라 조선은 1394년 한양 천도를 단행한 후 왕이 경복궁에서 남쪽을 보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경복궁 왼쪽에 종묘를 건립하였다.
종묘 정전이 5년간의 보수 작업을 마치고 지난 4월 20일 대중에게 공개됐다.
『태조실록』에도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을 내는 것이며… 이것은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여 종묘의 정비가 왕조의 우선 사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1395년 9월 한양에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같은 해 10월에 개성에서 옮겨온 4대조 이하 선조들의 신주를 봉안했다.

창건 당시 종묘는 대실 7칸,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으로 출발했으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점차 증축 과정을 거쳤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자, 명종은 정전을 4칸 증축하여 총 11칸으로 하였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종묘는 모두 소실되었다.

선조가 환도한 이후 종묘 재건을 위해 ‘종묘수조도감’이 설치되어 1608년(선조 41) 공사에 착수하여, 광해군 즉위 이후 종묘가 재건되었다. 광해군 때 재건된 종묘는는 명종 대의 정전 규모인 11칸으로 하였고, 영녕전의 좌우 협실은 1칸씩 늘렸다. 영조 대에는 종묘를 15칸으로 늘렸으며, 오늘날의 종묘와 영녕전을 갖추게 된 것은 헌종이 즉위하면서였다. 헌종 대에 종묘를 19칸으로 늘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묘의 증축 과정은 『종묘의궤(宗廟儀軌)』의 제작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정전과 영녕전

종묘는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모셨다가, 이후 왕이 승하하면 그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방식이었다.

1421년(세종 3) 정종(定宗)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太室)이 부족하므로, 정전과는 별도의 사당인 별묘(別廟)를 건립했는데 이것이 영녕전이다. 1421년 7월 18일 『세종실록』에는 “영녕전의 기지(基地)를 종묘의 담 안 태실(太室)의 서쪽에 정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10월 9일의 “영녕전이 낙성되었다.”는 기록은 영녕전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1421년(세종 3) 정전과는 별도의 사당인 별묘(別廟)를 건립했는데 이것이 영녕전이다.
영녕전에는 처음 태조의 4대조를 옮겨 모신 이후, 4대가 끝난 왕과 왕비들을 모셔 오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런데 태조는 물론이고, 태종, 세종, 세조처럼 공적이 많은 왕의 신주는 차마 영녕전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이들의 신주는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정전에 그대로 모셨고, 서쪽부터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등 불천위 14위와 문조(효명세자),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총 1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문조부터 고종은 순종의 4대조가 되기 때문에 정전에 그대로 모셔지게 된 것이다.

영녕전은 중앙에 태조의 4대조와 왕비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쪽부터 정종, 문종, 단종, 덕종(의경세자), 예종, 인종, 명종, 원종(인조의 아버지), 경종,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 영친왕의 신위를 모셨다.

정전과 영녕전에 따로 배향된 왕의 모습에서, 조선시대에도 왕의 업적을 냉정하게 평가한 시대상이 확인되는 것이다. 최고의 존엄 조선의 왕들이 마치 정전 소속의 1부와 영녕전 소속의 2부 리그처럼 구분되어 배향된 것은 불천위 제도 때문이었다.

공덕(功德)이 많은 왕은 변함없이 정전에 모신다는 불천위의 적용으로, 지명도가 있는 왕들은 계속해서 정전을 지키게 된 것이다. 종묘 정전은 국보, 영녕전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종묘 전체는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건축의 멋을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이 종묘에 거동하여 진행하는 종묘대제(宗廟大祭)는 가장 규모가 큰 행사였고, 이때 연주되었던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는 새해를 맞이하여 왕들이 찾아 선조에게 인사를 드리는 곳이기도 했다. 1763년(영조 39) 『승정원일기? 1월 1일 기록에는 새해 첫날 영조가 선대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진 종묘에 거둥했던 모습이 나타난다. 영조는 진시(오전7~9시)에 종묘로 향했고, 이 행차에는 승정원의 비서들과 사관(史官)들이 수행했다. 종묘 참배에 이어 영조가 찾은 곳은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이었다. 후궁은 왕의 어머니일지라도 종묘에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어머니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을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 옆에 조성하였고, 고종 대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을 육상궁 경역으로 옮겼다. 이렇게 일곱 개의 후궁 사당이 조성되면서, 칠궁(七宮)으로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

종묘는 중심 건물인 정전과 영녕전 이외에 다양한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정전 담장 안에는 각 왕별로 공신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천지 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설치된 것도 눈에 들어온다.

공신당은 선대 왕들의 곁에서 공로가 컸던 신하들을 따로 모시는 사당으로, 역대 왕별로 2명부터 7명까지 총 83명의 ‘배향공신’의 신위가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판 ‘왕의 남자’라 할 만하다. 세종의 묘정에는 황희와 최윤덕, 성종의 묘정에는 신숙주, 정창손, 선조의 묘정에는 이황과 이이, 숙종의 묘정에는 남구만, 최석정, 정조의 묘정에는 김종수, 김조순 등이 배향되어 있다.

칠사당은 왕의 운명과 복을 기원하는 일곱 귀신을 모신 사당이다. 칠사의 신은 사명지신(司命之神), 사호지신(司戶之神), 사조지신(司竈之神), 중류지신(中霤之神), 국문지신(國門之神), 공려지신(公勵之神), 국행지신(國行之神)으로 민간 신앙이 흡수되어 있다.
종묘 망묘루를 찾은 시민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이외에 망묘루(望廟樓)는 제향(祭享) 때 왕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향대청은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어숙실(御肅室)은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정전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재궁(齋宮)이라고도 하며,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르는 왕세자 재실, 서쪽에 왕과 세자가 목욕한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전사청은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를 올리는 것을 준비하던 곳, 제정은 제사에 사용되는 물을 준비하는 우물이다. 왕도 마셨다 하여 어정(御井)이라고도 한다. 악공청(樂工廳)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도 하던 곳이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던 곳, 수복방은 종묘를 관리하던 수복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신 신당인 공민왕 신당(神堂)이 망묘루 동쪽에 있는 것도 주목된다. 태조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공민왕을 모실 것을 명한 것에서 유래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駿馬圖) 세 점도 같이 있다.

종묘 정전이 수리를 마치고 개방되면서, 종묘를 찾는 즐거움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2022년에는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으로 일제가 없애버린 창경궁과 종묘 사이 궁궐 담장과 왕이 비공식적으로 종묘를 찾아가던 북신문(北神門)이 복원되었다. 종묘에서 창경궁을 연결하는 통로가 복원되면서, 왕실의 사후 공간과 거처 공간이 바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진수와 함께 장엄한 건축미를 갖추고 있는 종묘를 찾아 그 속에 담겨있는 선조들의 정신까지 접해보았으면 한다.
 
출처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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