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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속 '황금 거리'는 바로 여기! 우리가 몰랐던 귀금속 이야기

by 카이로 B.G.PARK 2025.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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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귀금속 매장에 금 장신구가 진열되어 있다.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32) 지상 최대의 황금 거리를 찾아서

서울의 그 많은 거리와 골목 중에 황금 거리라고 부를 만한 곳이 있을까? 20세기 초에 많은 사람들이 아예 ‘황금정(黃金町)’이라고 부르던 곳이 있기는 있었다. 지금의 을지로1가와 을지로2가 사이에 있던 지역을 일컫는 말인데, 원래는 순우리말로 구리개라고 부르던 길이었다. 그런데 질퍽하니 누런 진흙길이 잘 생기는 모습을 보고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이 황금색이라고 하여 한자어로 황금정이라는 이름을 구리개 대신 자주 썼다고 한다. 대한민국 시대가 되어 지금은 다시 구리개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으니 이제는 이곳이 황금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정말로 황금이 많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황금 거리라고 할 만한 곳을 찾는다면 역시 종로 귀금속 거리를 꼽아볼 만하다. 종로 귀금속 거리는 종로3가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황금을 비롯한 각종 귀금속 제품을 거래하는 업체가 밀집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귀금속을 거래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굉장하다고 할 만큼 많다. 2024년 3월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귀금속 제품 제조 업체 숫자의 약 40%가 종로구에 있다고 한다. 종로구의 귀금속 제조 업체들 중 대다수는 바로 종로 귀금속 거리 인근에 있으니, 이 지역은 단연 한국 귀금속 제조 업체들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통계에서 귀금속 제조, 거래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아도 종로구라는 좁은 행정 구역에서 조사된 숫자가 7,254명으로 전국 종사자 숫자 3만 3,064명의 20%나 된다. 그러니 종로 귀금속 거리를 두고 여전히 7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황금을 만지며 일하는 곳이라고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경제가 발달한 편이고 현재 황금은 투자 상품으로도 활발히 거래가 되는 물질이다. 그러니 한국 같은 나라의 귀금속 업체들이 한 군데의 거리에 집중되어 몰려 있는 모습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종로 귀금속 거리의 전성시대에는 이곳의 업체 숫자와 손님 숫자가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아시아에서 비슷한 다른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로 귀금속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시절이 있었고, 민경진 기자가 보도한 의견에 따르면 한 때는 세계 최대 규모의 귀금속 업체 밀집 지역이 바로 서울의 종로 귀금속 거리라고 평가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귀금속 도매상, 소매상, 귀금속으로 반지나 장신구를 만드는 각종 가공, 제조 업체들을 합해 수천 개의 업체들이 그물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제품을 팔고 사며 황금 거리를 빛내고 있었다.
종로3가 인근에 조성된 귀금속 상가 밀집지역

전국 귀금속 제품 제조 업체의 약 40%가 자리한 종로

그렇다면 종로 귀금속 거리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 서울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고 서울 중에서도 종로는 특히 역사가 더 깊은 지역이다. 그러나 의외로 종로 귀금속 거리의 역사는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다.

우선 조선 시대에는 귀금속의 거래가 무척이나 침체되어 있었다. 거기에 대해 경제적인 이유나 지정학적인 이유도 이야기해 볼 수 있겠지만 문화적인 이유도 중요했다. 즉, 조선 시대에는 귀금속의 생산과 거래 자체를 무척이나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꽤나 널리 퍼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귀한 가치가 있는 물자를 확보하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세상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싶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를 들어 《일성록》 1784년 음력 2월 25일 기록을 보면 이성원이라는 인물이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정조를 향해 황금을 캐는 광산을 폐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금광에 매달려 놀고 먹는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광산 일은 보통 여러 직업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데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황금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놀고 먹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뒤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의견에 정조 임금도 공감하고 있다. 그 까닭은 황금을 구하는 일이 당장 먹고사는 일과는 관련이 먼 사치품에 관한 사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도덕과 명분을 중요시했던 조선 시대 사고방식으로는 나라에 굶는 사람도 많은 형편에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는 농사일에 힘쓰는 것이 성실한 일이지, 장신구 따위나 만들 수 있는 황금을 얻는 산업에 투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 내지는 도덕적이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랬기에 조선 시대에는 종로에 대규모 귀금속 거래 업체들이 모여든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웠다. 상황이 변한 것은 자본주의의 시대가 된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정확한 사정이 자세히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종로 귀금속 거리는 1970년대에 길거리에서 간이 좌판을 깔고 이런저런 물건을 거래하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시절의 귀금속 거래도 고정관념과는 좀 다르다. 황금을 거래하는 사람들이니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거래에 참여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종로 귀금속 거리가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이전 시기, 처음 거래에 뛰어든 사람들은 저소득층이나 판자촌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가난한 형편에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집안에 내려오던 몇 안 되는 패물이나 시계를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거래를 위해 좌판 상인들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골동품이나 귀중품을 거래하는 가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인사동 지역에 많았는데, 추정해 보자면, 그런 정도의 번듯한 가게에서 거래할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인근 지역의 길거리에서 금붙이나 은붙이를 팔고 사는 일이 반복되면서 상인들이 처음 자리 잡은 듯싶다. 이렇게 보면 한때 세계 최대의 황금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시작된 것도 오히려 가난한 살림의 눈물에서 출발한 셈이다.

이후 1980년대를 지나는 동안 정식으로 자리를 잡은 업체들이 종로 3가 인근에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성장이 이루어졌고, 1990년대 들어 서울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동안 지금과 비슷한 귀금속 상가 밀집 지역으로 종로 귀금속 거리는 변화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지역은 결혼식 예물이나 돌반지를 구하려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투자를 위해 금괴를 사려는 사람들까지 귀금속을 원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모두 모여드는 특색 있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금수저’, ‘은수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백일잔치나 돌잔치에 황금으로 자그마한 수저를 만들어 선물하는 문화도 생겼다고 하니 그 발전의 모습이 확실히 눈길을 끌 만하다.
종로 3가 인근에 자리한 귀금속 상가 밀집 지역인 '종로 귀금속 거리'

스마트폰에도 들어있다! 전자 산업의 필수재료 ‘황금’

황금 시세가 요즘은 지나치게 과열되었다는 평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금이 투자 대상으로 한동안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장신구 재료 목적 외에 실용적인 산업 목적으로도 금의 용도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에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한 전자 산업에서 황금은 꼭 필요한 곳이 꽤 많다.

황금이 예로부터 인기 있는 장신구였던 것은 워낙 다른 물질과 반응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그 색깔과 형체를 유지하면서 오래도록 잘 유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금은 녹이 스는 등의 변화를 겪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러면서도 금은 전기가 매우 잘 통하는 재료다. 그렇다 보니 전자 제품에서 오랜 시간 변질되지 않아야 하면서 튼튼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전선을 만드는 재료로 황금은 굉장히 유용하다. 예를 들어 정밀한 반도체에 연결된 아주 가느다란 전선이 어느 날 녹이 슬어서 전기가 통하지 않게 되거나 아예 끊어져 버린다면 그 작은 손상만으로 거대한 컴퓨터나 컴퓨터에 연결된 장치 전체가 먹통이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중요한 연결 전선 재료로는 녹슬지 않고 오래 가는 성질을 지닌 황금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스마트폰 한 대 속에는 0.03g의 황금이 들어 있다는 통계도 종종 언급되는 편이다.

황금 이외에도 종로 귀금속 거리에서는 금과 섞거나 도금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재질이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다른 귀금속 재료도 여럿 취급하고 있다. 예로부터 귀금속으로 취급되던 이나 백금 같은 금속도 거래되고 있고, 백금과 성질과 색이 비슷하면서 비교적 근래에 들어 희귀한 자원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팔라듐이나 로듐 같은 금속도 사용하는 업체들이 있다.

백금이나 팔라듐 같은 물질은 황금에 비하면 낯설게 들릴 수도 있는데, 화학 공장에서는 한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꿔 주는 역할을 하는 촉매의 재료로 굉장히 널리 쓰이고 있다. 그래서 촉매가 될 수 있는 금속의 대표를 꼽아 보라고 하면 백금과 팔라듐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온갖 약품, 옷감, 고무, 플라스틱 등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이런 귀금속들은 꼭 필요하다.
자동차 배기가스 오염 물질 제거 장치에 로듐 촉매가 쓰인다.

도금 재료로 사용되던 ‘로듐’의 재발견

하다못해 그보다도 더 낯선 재료인 로듐만 하더라도 세계 산업계의 방향을 뒤흔든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2010년대 중반에 “디젤 게이트”라고 해서 일부 독일 자동차 회사가 디젤 엔진의 배기가스를 조작했다고 해서 큰 스캔들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한 때는 세계 최강이라고 하던 독일 자동차 산업이 주춤했고,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 사건의 충격 때문에 독일 자동차 업체들이 미래의 전기 자동차 시대에 대비하는 것까지 늦어지는 바람에 독일 산업과 경제가 힘들어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자동차 배기가스의 오염 물질을 파괴하고 제거해 주는 장치에서 핵심으로 사용하는 물질이 로듐 촉매였다. 즉, 로듐 촉매를 흔히 이용하는 LNT 등의 이름이 붙어 있는 자동차 부품이 작동하지 않으면 배기가스 오염 물질이 잘 제거가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디젤 게이트는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다.

한때는 종로 귀금속 거리의 장인 손길에서 반지나 귀고리를 도금하는 재료로 사용되던 로듐이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공기를 맑게 해 주는 장치에 쓰이기도 하고 그 장치에 얽힌 문제 때문에 거대한 경제 문제가 되는 것이 과학 기술이 연결하고 있는 요즘 세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산업의 여러 용도로 금, 백금, 팔라듐, 로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물질들이 더 큰 투자 가치를 얻어 그 시세가 복잡하게 오르내리는 일이 생기게 된다. 말하자면 자동차 산업이 잘 되면 그만큼 자동차에 장착되는 배기가스 오염 물질 제거 장치도 많이 팔리기 때문에 로듐 시세가 오르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는 종로 귀금속 거리에 반지를 사러 갈 때에도 세계 산업계의 기술 전망에 따라 제품을 고르면 더 좋은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아쉽게도 과거 전성기에 비하면 요즘의 종로 귀금속 상가가 조금 주춤한 모습은 있다. 예전에 비하면 결혼도 줄어들고 태어나는 아기도 줄어들어 예물을 주고받을 일도 적어졌고, 땅값 문제라든가 자영업 경기의 전반적인 불황으로 인한 사업의 어려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로 귀금속 거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유명 보석 상가와 비교해 보거나 유럽의 장신구 브랜드와 비교해 보면 이곳은 훨씬 더 생활에 밀접한 감각을 지닌 중소상공인 중심 상가라는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이런 개성을 좋은 방향으로 잘 발전시킬 수 있다면, 다양한 방향으로 귀금속이 투자 대상이 되는 요즘 시대에 종로 귀금속 거리가 세계에서도 유명한 황금 거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출처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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