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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엔 맨해튼, 서울엔 여의도가 있다! 모래섬의 상전벽해

by 카이로 B.G.PARK 2025.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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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는 정치와 언론, 금융의 중심 기관들이 대거 몰려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0) 여의도의 역사와 공간들

여의도(汝矣島)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 63빌딩, 국회의사당, 방송국, 여의도공원, 금융기관, 아파트 단지 등. 지금 여의도에는 정치와 언론, 금융의 중심 기관들이 대거 몰려 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 섬이 형성돼 있고, 금융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여의도를 뉴욕의 맨해튼 섬에 비유하기도 한다.

여의도라는 명칭의 유래

조선 시대 여의도는 성저십리(城底十里)의 일부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는 고양에 속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마포구와 더 가까운 공간이었다. 현재 여의도는 마포 쪽에서는 마포대교를 건너고, 영등포 쪽에서는 서울교를 건너 통하게 돼 있지만, 그 이전에는 배로 건너는 모래섬이었다.

일제 강점 시기 여의도에는 연병장이 있었고, 1929년 이후로는 비행장으로 활용됐다. 1968년 은방울 자매가 발표한 노래 ‘마포종점’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라는 가사는 이러한 모습을 표현했다. 그러나 1968년 58,000㎡의 밤섬(栗島)을 폭파하고, 거기서 캐낸 돌로 윤중제(輪中堤)를 만든 후에 비행장은 사라지고, 현재의 여의도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갖추게 됐다.

1990년대까지는 큰 광장이 조성돼 있었는데, 1987년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후, 여의도광장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여야의 대통령 후보들이 대규모 유세 경쟁을 펼친 공간이기도 했다.
현재 여의도는 마포 쪽에서는 마포대교를 건너고, 영등포 쪽에서는 서울교를 건너 통하게 돼 있지만, 그 이전에는 배로 건너는 모래섬이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여의도(汝矣島) 등으로 불렸는데, ‘넓은 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잉화도’의 잉(仍)은 고유어 ‘느’ 또는 ‘너’의 한자 표기이다. ‘화(火)’의 뜻인 ‘불’은 중세어의 ‘블’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곧 ‘잉화도’는 ‘너블섬’의 한자 표기로 볼 수가 있다.

‘나의도(羅衣島)’의 ‘나(羅)’는 ‘너’의 음차, ‘의(衣)’는 옷을 세는 단위인 ‘벌’의 훈을 따온 것으로, ‘너벌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의도(汝矣島)’ 또한 너의 ‘여(汝)’ 자와 어조사 의(矣)자가 옷 의(衣) 자와 혼용되며, ‘너벌섬’이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조선시대 목축장으로 활용된 여의도

여의도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21년(세종 3년) 1월 22일 『세종실록』이다. “양·돼지·닭·오리·기러기 등은, 예전에는 수연(水碾:홍제동에 있음)과 잉화도(서강(西江)에 있음) 등지에 나누어 길렀는데, 관리를 보내어 감독하여 기르게 하였으나, 마음을 써서 먹여 기르지 아니하므로 양과 돼지가 날로 파리하기만 합니다.”라는 기록을 보면, 잉화도 즉 여의도는 목장으로 활용됐음이 나타난다.

1472년(성종 3) 10월 15일의 『성종실록』에도, “이전에는 전생서(典牲署)의 염소를 반은 잉화도에 놓아 길렀으나 금년은 비가 많이 와서 섬 전체가 모래로 덮이어 염소에게 먹일 풀이 없으니, 청컨대 풀이 무성할 때까지 본사(本司:전생서)에서 합치어 기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잉화도에 염소를 주로 길렀으나, 홍수로 섬이 잠겨 목초가 부족하니 전생서로 옮겨 목축하자는 내용이다.

1530년(중종 25) 중종 대에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잉화도’ 항목을 보면, “서강(西江) 남쪽에 있고 목축장이 있다. 사축서, 전생서의 관원 한사람씩을 보내어 목축을 감독한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여의도가 조선시대 주요 목축장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조선전기의 학자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밤섬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해마다 이를 따서 누에를 쳤다. 옛날 서울 성안 큰 집에서는 다만 서너 집이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큰 집뿐 아니라 비록 일반인의 조그마한 점방이라도 누에를 기르지 않는 집이 없어서 뽕잎이 극히 귀하여 뽕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많았다.”고 해, 여의도 앞 밤섬에 뽕나무밭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1556년(명종 11년) 4월 4일의 『명종실록』을 보면, “잉화도는 양화진과 율도 사이에 있는 별도의 구역으로 조종조 때부터 돼지와 양을 방목하여 가축을 기르는 곳으로 만들어 전생서(典牲署)와 사축서(司畜署)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 관청의 노비들이 돼지와 양을 기르는 일 때문에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그들의 풍속이 족친끼리 서로 혼인을 하여 사촌이나 오촌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홀아비나 과부가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시키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섬의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주십시오.” 라고 해, 여의도에 친인척끼리 거주해 풍기가 문란했던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여의도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21년(세종 3년) 1월 22일 『세종실록』이다.
영조 때인 1751년(영조 27년)에 한성 도성의 지역을 구분하는 지도를 만드는데, 한성부 서부 연희방 내에 ‘여의도계(汝矣島契)’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여의도’라는 명칭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사례다. ‘방’은 현재의 ‘구’, ‘계’는 ‘동’과 비슷한 단위로 볼 수가 있다.

고종 때에 편찬된 지리지인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나의주(여의도)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사축서와 전성서의 관원을 보냈으나 이를 폐지했다. 지금은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만을 놓아 기른다.”고 해 고종 때에 오면, 여의도의 관영 목축장 기능이 대폭 축소됐음을 알 수 있다.

근현대 여의도의 변신

여의도는 1914년 3월에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할 때에 고양군 용강면(龍江面:현재의 서대문구, 마포구 일대. 용강면은 마포구 용강동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이 됐고, 1915년에 밤섬과 합쳐 여률리(汝栗里:여의도와 밤섬)가 됐다. 1936년 경성부가 확장돼 영등포 일대가 편입된 후에는 경성부 여의도정(町)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해방 후인 1946년에 여의도동이 됐다.

여의도의 획기적인 변신은 1968년 한강 종합개발 공사 계획으로, 본격적인 여의도 개발에 나서면서 부터였다. 1968년 밤섬 폭파 후 그곳의 잡석들로 윤중제가 설치되면서, 여의도는 완전히 새로운 변신을 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한때 여의도를 상징했던 비행장이 사라졌다.

1929년 4월에 개장한 여의도 비행장은, 1958년 김포공항으로 여객 업무가 이관되면서 점차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공군기지가 1971년 경기도 광주군(현재의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으로 이전하면서 폐쇄됐다.

여의도는 서울의 도시화를 상징하는 시범적인 공간이 됐고, 현대화의 상징인 아파트와 빌딩 건설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1971년 10월 착공 1년 만에 24개 동 1,584가구 규모의 ‘시범아파트’를 준공했는데, 12층 높이의 시범아파트는 당시에 가장 높은 고층아파트였다.
여의도는 서울의 도시화를 상징하는 시범적인 공간이 됐고, 현대화의 상징이 아파트와 빌딩 건설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시범아파트를 중심으로 주거용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삼익, 삼부, 미주, 한양 등 건설회사 이름이 들어간 아파트 이외에, 수정, 은하, 백조, 공작, 화랑, 장미 등 유행했던 담배의 이름을 아파트에 적용한 것이 흥미롭다. 그만큼 담배 이름이 대중들에게 익숙했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여의도초, 여의도중, 여의도고 등 초·중·고등학교가 여의도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고 특수학군제가 적용되면서, 중산층과 전문직 종사자의 여의도 거주를 촉진시켰다.

1975년 8월 15일에는 1968년 기공됐던 국회의사당 건물이 완공됐다. 국회는 태평로 시대를 마감하고, 여의도 시대를 시작했다. 당시 국회의사당 건물 완공을 기념하는 우표도 제작됐다.
1975년 8월 15일에는 1968년 기공됐던 국회의사당 건물이 완공됐다.
1976년에는 남산에 있던 KBS(한국방송)가 여의도 신사옥으로 이전했고, 1980년 TBC(동양방송) 여의도 신사옥이 준공됐다. 그러나 TBC 건물은 준공되자마자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KBS로 흡수됐다. 이 건물은 현재 KBS 별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KBS를 시작으로, 1982년 MBC(문화방송)가 여의도에 사옥을 마련하고, 1990년 SBS(서울방송)가 개국 후 여의도에 본사 사옥을 마련하면서, 여의도는 방송국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KBS를 시작으로 여의도는 방송국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여의도의 랜드마크

한동안 여의도를 기억시키는 대표적인 공간은 비행장 자리에 들어선 여의도광장이었다. 1972년 여의도 발전 계획 과정에서 큰 광장이 조성됐고, 처음에는 ‘516 광장’이라 불렀다가, ‘여의도광장’으로 그 명칭을 바꿨다.

국군의 날 행사, 대규모 집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는데,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가 경쟁적으로 이곳에서 대규모 유세를 벌였다.

1983년 KBS가 주관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남북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시절, 여의도광장은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기도 했다. 138일간 이어진 기록물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여의도광장은 1999년 도심 속 녹지 공간인 여의도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광장은 조성 이후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개방이 돼 젊은 층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기도 했다. 1997년부터는 광장의 공원화 사업이 진행됐고, 1999년 도심 속 녹지 공간인 여의도공원으로 재탄생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여의도의 랜드마크가 된 대표적인 건물은 1980년 2월에 착공해, 1985년 5월 완공 후 7월에 개장한 63빌딩이다. 지하 3층 지상 60층 규모로, 1970년대 서울 고층 빌딩의 상징이었던 종로구 관철동의 31빌딩을 2배의 높이로 압도했다. 63빌딩은 서울에 고층 빌딩의 시대가 열렸음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지하 2층의 아쿠아리움과 60층의 전망대는 특히 인기를 끌었다. 1985년 대학생 시절 지방의 부모님이 서울을 방문한 후 가장 먼저 가보자고 하셨던 곳도 63빌딩이었고, 덕분에 필자도 개관 초기에 이곳을 찾은 기억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여의도의 랜드마크가 된 대표적인 건물은 1980년 2월에 착공해, 1985년 5월 완공 후 7월에 개장한
63빌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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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는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어서 금융기관의 메카로도 불린다. 증권거래소와 금융감독원을 비롯해, 한국경제인협회(前 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도 여의도에 자리를 잡았다. 전경련회관은 1979년 20층의 건물로 출발한 후, 2013년 51층의 신축 건물(FKI Tower)을 완공했다.

2012년에는 서울국제금융센터(IFC)가 개장했다. IFC몰에는 백화점, 영화관 등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여의도의 대표 공간이 됐다. 2020년에 완공된 69층의 파크원타워는 63빌딩을 제치고 이제 여의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 여의도는 한강 건너 강북 일대와는 서강대교, 마포대교, 원효대교로 연결돼 있으며, 샛강을 사이에 두고 영등포 일대와는 서울교 등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1996년 5호선 여의나루역과 여의도역의 개통, 2009년 9호선의 여의도역, 샛강역의 개통은 여의도에 대한 접근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출처 : 내손안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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